영원한 사랑의 약속
그녀와 서로 꼭 붙어서 지내면서 좋았던 순간들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나의 공간과 나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다툼이 많아지고 서로가 날카로워지는 순간들이 늘어났던 때에, 다행스럽게도 그게 바로 공간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된 거죠. 저는 개인적으로 '미학적 거리'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하더라도 서로가 아름다워 보이기 위한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법입니다. 크고 작은 사회 안에서 사람과 사람은 늘 맞닿아서 살긴 합니다만, 연인 간에 강박적으로 모든 걸 함께하거나 같은 생각을 강요하는 건 건강한 관계 형성에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하니까요.
연애 초기에는 그녀의 성장과정, 현재의 모든 일상, 앞으로의 우리 인생 계획, 심지어 예전 연애사(-_-)까지도 모두 알고 싶어 했었습니다. 저는 궁금한 걸 못 참는 성격이라, 그녀를 잠도 못자게 흔들어 깨워가며 물어보곤 했었습니다. 그땐 사랑하는 관계에서는 서로에 대해 당연히 모든 걸 다 알아야 생각했는데, 그녀의 생각은 다르더군요.
그녀는 아직 제게 '영원한 사랑의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늘 배려하는 성품을 갖고 있고 나를 항상 아끼는 것도 느껴지고, 사랑한다는 말도 잘 하는 사람이, "평생 같이 할게"라든가 "다음 생에도 널 만날거야" 류의 달달구리한 약속은 절대 안합니다. 지금 사랑하는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지만, 앞으로의 감정에 대해 지금 약속을 하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겁니다.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너무 구구절절 맞는 말인데, 마치 나중에 헤어질 때를 준비하는 말 또는 비겁한 이별의 핑계를 대는 것 같아 이 문제 때문에 한참을 다투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연애 초기에 꼭 필요한 종류의 다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모든 주장이 전부 다 옳았다는 게 아니고, 그런 사소한 다툼을 통해서 서로의 생각이 다른 지점을 발견하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죠.
다른 환경, 다른 가치관을 갖고 오랜 시간을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참 놀랍고 멋진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운'을 필요로 하는 일 같아요. 우리는 상대방의 장점, 단점, 가치관, 도덕적 관점, 성격의 모난 부분에 대해 잘 모르고 관계를 시작하게 되잖아요.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조차 스스로도 잘 모른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연애를 시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가장 비극적인 부분은 우리의 타고난 본질적인 어떤 부분들이나 성격 중 일부분은 바뀌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초기엔 '눈이 멀 정도로 빛나는 사랑' 탓에 그런 문제들을 "못" 보거나 "안" 보게 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지점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합니다. 예전엔 그 사람을 빛나게 만들었던 솔직한 대화법이, 어느 순간부턴가 잔인하고 무신경하며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말투로 느껴지게 되기도 합니다. 여기부터 바로 두 사람의 "운"과 "노력"이 필요한 순간이 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랜 관계를 유지해온 사람들에게 그들의 비결을 묻는 건, 좀 어리석은 일 같아요. 숨겨진 비결이랄 게 사실은 별로 없고, 9할의 운과 1할의 노력이 합쳐진 결과 같거든요. 물론 9할의 운이 있었다하더라도 서로 함께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 이미 예전에 헤어졌을거에요. 하지만 서로를 위한 노력들만으로 모든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노력만으로 관계가 유지된다면, 어쩌면 헤어지는 커플은 세상에 없을거라고 생각해요.
최근에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이 계셨는데 마음이 많이 아프더군요. 그분들을 보면서 평생 무사고 운전과 같은 건, 나의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하늘이 도와야 가능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그녀와 나눴어요. 지금까지는 그녀와 제가 가끔 툭탁거리긴 해도, 적당한 지점에서 서로 노력하기도 했고 다행스럽게도 그 지점은 서로가 용납할 수 있는 범위에 있었습니다. 저는 종교가 있는 사람이니까 그건 신의 도움이라고 생각하지만 앞으로도 항상 반드시 그럴 거라는 확신은 솔직히 없어요.
이런 면에서 이제는 그녀의 생각과 제 생각이 서로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사랑의 약속을 하지 않는 그녀가 이제는 비겁하게 느껴지지 않고 그 마음이 오히려 고마워요.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약속이나 어떤 의무감 때문에 나와 함께하는 게 아니고, 온전히 날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나와 지금 함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걸 열심히 발견하고, 또 그런 부분을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이제는 노력 중입니다. 산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없지만,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많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처럼, 어쩌면 서로의 관계에서 우리를 상처입게 하는 건 지금까지 미처 몰랐던 아주 작고 사소한 문제들 같아요. 연애도 늘 새로운 단계들을 맞이하면서 성장통 같은 것들을 겪게 되곤 하는데, 당시에 어쩌면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던 공간의 문제였던 것이고,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집 - 조금 더 넓고 각자의 공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을 찾음으로써 잘 해결되었지요.
그리고 이사가 마무리될 무렵에, 운명처럼 그 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