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일상

은행구이 같은 사람

레즈고홈 2018. 1. 27. 22:11

꼬부 큰언니는 어릴 적부터 그냥 여자가 좋았다고 하던데, 저는 대학생이 될 때까지 성정체성이나 성적 지향 때문에 고민을 해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를 만나도 사귀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별로 없었으니까요. 사람들과 그냥 알고 지내는 수준까지는 쉽게 도달하지만, 상대방과 정신적인 교감이 충분히 이뤄지기 전까지는 여성/남성을 막론하고 상대방에게 애정이 생기지 않는 편입니다. 부모님의 표현을 따르자면 저는 '정이 없는 아이'인데, 굳이 따지자면 그냥 데미섹슈얼에 가까운 레즈비언으로 타고난 게 아닌가 싶어요.

 

이런 나의 성향을 굳이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은행구이가 아닐까 싶어요.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으시죠? '양파 같은 사람'이라는 비유는 '까도 까도 새로운 매력이 드러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주 흔하게 사용 되잖아요. 그런데 성향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은행구이가 튀어 나오다니... 이걸 설명하려면, 그녀와의 오랜 추억을 더듬어야 합니다.

 

예전에 그녀와 함께 살던 집 근처엔 큰 공원이 있었는데, 틈날 때면 거기서 그녀와 저는 산책하는 걸 참 좋아했습니다. 겨울이 되면 꽁꽁 얼어붙은 호수에 쌓인 눈 위에 남아 있는 어떤 사람들 장난스러운 발자국을 보며 깔깔 웃기도 했고, 봄이 오면 벚꽃이 휘날리는 장관에 감탄하기도 했고, 여름엔 선선한 밤바람과 연꽃을, 가을엔 은행잎으로 물든 산책로를 만끽했지요. 그렇게 계절이 바뀌던 매 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너른 공간이 우리 집 근처에 있었던 건, 정말 축복이었어요. 지금은 공원과 좀 멀리 사는데, 다음에 이사를 하게 되면 꼭 공원 옆에 살고 싶어요.

 

그 당시에 어느 가을날 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주말 아침에, 불현듯, 공원의 은행나무에서 떨어졌을 은행들을 주워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은행구이를 정말 좋아하는데, 이건 길거리에서 흔하게 파는 음식이 아니라서 극장가나 일식 꼬치구이 집에 가야만 먹을 수 있잖아요. 은행을 주워오면 집에 쟁여두고 아무 때고 볶아 먹을 수 있겠다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었죠. 뜬금없이 그녀를 흔들어 깨워서 "공원으로 은행 주우러 가쟈!!!! >_<" 했더니 잠시 구시렁거리더니 고맙게도 따라 나섰어요. 아마도 귀찮았겠지만, 비오는 주말 새벽에 나만 혼자 보내기엔 불안해서 따라 나섰던 것 같아요. (역시 그대는 나의 고마세리! 이게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면 여기를 클릭!)

 

그날 새벽에 둘이 세수도 안하고 눈곱만 뗀 채,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한 손에는 봉지와 집게를 들고서 공원을 돌아다니며 정말 열심히 은행을 주웠어요. 비오는 새벽녘부터 공원에서 은행 줍는 아줌마들이라니... 어쩌면 그냥 흔한 동네 풍경이었을지도 몰라요. 한참을 줍고 나니 봉지 한가득 모으긴 했는데, 은행 특유의 냄새가 아주 온몸에서 진동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먹는 은행은 은행 열매의 씨앗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 열매는 독성이 있어서 맨손으로 만지면 안 됩니다. 잘 익은 은행의 과육은 꽤 물렁하게 쑥 들어가는데 그 속의 씨앗을 온전히 얻으려면 땅속에 잘 묻어서 과육 부분이 삭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에 과육 부분을 깨끗하게 잘 씻은 다음에 다시 잘 말려야 해요. 이 구구절절하고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만 맛있는 은행구이를 먹을 수 있어요. 그 과정을 정말 호되게 겪어보시면, 솔직히 은행은 그냥 편하게 꼬치구이 집에서 사먹는 게 최고라는 뻔한 답에 도달하실 거예요 -_-

 

예쁜 구석도 없고, 독기까지 있는데다 두드러지는 장점도 없는데, 함께하려면 손이 많이 가는 존재! 맞아요. 바로 그게 저예요. 외모도 그저 그렇고, 센스도 없고, 빼어난 점도 없는데다가 장점을 찾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은행구이 같은 사람! 열등감이 많다는 것은 사소한 상황에도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을 피곤하게 만들곤 합니다. 불행하게도, 타인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 대한 애정도 별로 없어서 가끔 한 번씩 지독한 우울감에 빠지기까지 하니까요.

 

그런데 정말 다행인 것은요. 비오는 가을날 새벽에 공원에서 은행을 주우러 나갔던 그 날의 우연처럼, 그녀는 나를 자신의 주머니에 소중히 넣은 다음, 내 독기어린 겉껍질을 깨끗하게 씻어주고, 햇볕에 널어서 말려주고 "넌 결코 하찮은 사람이 아니야"라고 지금도 다독여주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하여 저는 단단한 씨앗 껍질을 스스로 열고서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은행구이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는 중입니다. ^-^

 

P.S. 은행구이는 하루에 다섯 알 이상 먹으면 안된대요! 나는 뚠뚠하고 엄청 큰 은행구이니까 나로 그냥 만족하라고 그녀를 잘 설득해 봐야 할 것 같네요! 이 이야기를 한참 적었더니 은행구이가 갑자기 땡깁니다! 주말에 잘 익은 은행구이와 생맥주 먹으러 꼬치구이 집으로 가자고 졸라야겠어요. 냐아...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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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