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꼬부

여행을 못가요 ㅠ_ㅜ

레즈고홈 2018. 4. 27. 23:04

어릴 적부터 미술적인 감각이라고는 손톱 만큼도 없었던 탓에, 학교 미술시간에 매번 그림을 끝내지 못하는 일들이 반복되던 그 어느 날! 엄마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미술 학원이라는 곳에 갔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적 감각은 학원 교육으로 절대 해결되지 않는 영역이라는 걸 재빠르게 인정하고 - 사실은 집에서 울고불고 엄마에게 난리를 쳐서 - 미술학원은 그다지 오래 다니지는 않았는데요.


거기에서 배웠던 수업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습니다. 데생을 배우는 시간이었는데, 석고상을 보고 그림을 그리라는 겁니다. 아그리파 같은 고난이도 석고상은 당연히 아니었고, 원뿔 형태였어요. 선생님이 알려준 대로 구도를 잡고 음영을 잘 살려서 원뿔의 어두운 부분을 연필로 슥샥슥샥 열심히 색칠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다가와 이렇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에이... 어두운 부분이라고 해서 그렇게 무작정 어둡게만 칠하지 말고...자, 원뿔을 잘 봐봐. 그늘진 쪽의 제일 가장자리 부분...거기가 그냥 제일 어둡기만 하니? 자, 제일 어두운 부분의 맨 끝 쪽은 도로 환해져서 아주 밝게 빛나는 선이 보이지? 반대로 제일 환한 부분은 그냥 환하기만 하니? 제일 환한 부분의 끝에는 어두움이 있지? 그걸 살려서 그려야 그림이 진짜같이 보이는 거야"

 

헉! 진짜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새까맣게 칠해둔 쪽의 가장자리 부분을 선생님이 지우개로 스윽 지우고, 제일 환하게만 보였던 부분의 맨 끝에 그림자를 덧입히니 놀랍게도 현실감 있는 원뿔이 되었습니다. 가장 어두운 부분은 가장 밝은 부분과 맞닿아있다니... 참 멋지고도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정말 그동안의 인생을 되돌아보니, 늘 그런 일들이 반복되었던 것 같습니다.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 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구름 뒤에 태양이 감춰져 있어도, 구름의 가장자리가 은색 빛으로 빛나는 걸 보며 희망을 가지라는 말인데....불행인지 다행인지 몰라도, 어떤 일이든 나쁜 일만, 또는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우리 꼬부가 집에 있어서 그녀와 제가 참 행복해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고양이~느무 좋아욧!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키우세요!"라는 말은 못합니다. 요즘처럼 계절이 바뀌면 집안 여기저기에 털이 폴폴 날리고요. 얌전하게 잘 있다가도 갑자기 우다다 뛰어다니며 소파를 죄다 긁어 놓기도 하고요. 꼬부 큰언니와 멀리 2주간 여행을 떠나자며 신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도 '그런데 우리 꼬부는 어째? ㅠ_ㅜ' 하면서 현실로 돌아와서 1박2일 여행계획으로 마음을 바꾸지요. 모래나 사료가격도 참 사악하고요. 몸집은 작은 녀석이 응가 냄새를 어찌나 찐하게 풍기는지! =_=

 

그런데 그 어두움의 가장 끝에는 이 작고 귀여운 녀석의 반짝거리는 밝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 이 아이가 다가와 무심한 척 쓰윽 비비고 지나갈 때.....머리를 쭈욱 내밀고 있는 큰 언니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낼롬낼롬 열심히 그루밍하는 꼬부의 알콩달콩 귀여운 모습을 지켜볼 때...... 정말 행복합니다.

 

꼬부에게는 늘 무언가 주기만 하게 되는데, 그게 억울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기쁨이 된다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물질적인 보답이 굳이 없더라도, 우리가 함께하는 과정에서 감정적인 행복으로 이미 충분히 돌려받고 있습니다. 내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자면, 꽤 속물적이기도 하고, 도덕심도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고, 남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타입도 아닌데.... 그녀와 꼬부에게는 늘 무장해제가 되어 버리네요.

 

그나저나 꼬부를 두고 도저히 떠날 수가 없는데도, 여행은 떠나고 싶어지는 오락가락 싱숭생숭 갈팡질팡 봄날입니다. ㅠ_ㅠ

 

꼬부네 가족 다음 이야기-31탄

꼬부네 가족 이야기 처음부터 읽기

 

P.S. 학원 교육에도 불구하고 구도 잡기나 색채적인 조합 등 제 미술적 감각은 전반적으로 여전히 꽝입니다만, 그래도 4B연필 잘 깎는 방법 하나는 확실히 배웠습니다. 뭐든, 하나라도 배운 게 어딘가요 ^_________^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