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마음

No more metaphors!!! (은유는 이제 그만!!!)

레즈고홈 2018. 10. 11. 18:03

 

  

올해 초에 꼬부 큰언니와 둘이서 2018년에 하고 싶은 일들 10가지를 함께 신나게 적었습니다. "노래방 가기"나 "오산의 새말해장국 먹으러 가기"처럼 아주 소소한 계획들도 있었고 "멀리 여행 떠나기"와 같은 거창한 내용도 있었는데요.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 중 하나가 바로 뮤지컬 관람이었어요. 한동안 둘이 함께 공연을 보지 못했거든요. 그러던 와중에 헤드윅의 원작자인 존 카메론 미첼의 내한소식이 들려왔고 신나게 티켓 오픈일자에 맞춰 광클릭 예매!!!꺄아아아아!!!!

 

유쾌한 공연이었고, 그의 매력에 폭 빠지는 시간이었습니다. 헤드윅의 곡들, 초기 제작과정부터 현재 그가 준비중인 작품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과 함께 우리 말로 된 노래들까지 들을 수 있었답니다. 가리봉동(-_-)과 엄마를 제외하면 거의 한국어를 못하는 듯합니다만 이번 공연에서 열쒸미 조관우의 [꽃밭에서]와 동요 [섬집 아기]를 불렀습니다. "옴마가 썸그늘에 따로 가묜~~" 이렇게요! 공연 중간에 질문이 있냐는 그의 말에 어떤 관객이 영어로 "왜 가발이 은발이에엽?" 하고 물으니,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나 이제 늙어짜나~" 합니다. 

 

정말 그의 은색 가발이 무색하지 않게 나이 든 티가 나드만요. ㅎㅎ 하지만 나이 든 아쟈씨가 숨이 차서 헥헥거리면 어떻습니까. 그의 가창력이 전같지 않으면 또 어때요!!! 원래 나이 듦이라는 게 신체적 노화를 동반하잖아요. 가창력이나 퍼포먼스가 창창하고 파릇파릇한 젊은 가수들보다 조금 뒤떨어지더라도, 그의 충만한 끼와 엄청난 에너지는 이미 그의 나이와 신체적 능력을 초월했어요. 

 

나이 든다는 게 신체적 기능들이 퇴화된다는 의미도 있겠으나, 진짜 나다움을 갖게 된다는 측면에서는 멋진 일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만약 존 카메론 미첼이 뮤지컬 '헤드윅'을 또다시 그대로 재연했다면 한국의 조승우, 오만석, 조정석 같은 뛰어난 뮤지컬 배우들의 공연과 '기능적인 측면'에서 비교되어 적잖이 실망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authenticity (진정성) 측면에서 그 어떤 뮤지컬 배우도 해낼 수 없는 헤드윅 창작에 관한 '진짜 자기 이야기'를 자기 색깔로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어릴 적엔 타인의 시선에서 나를 가두게 되어, 남들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타인과 자신을 사회적인 측면에서나 기능적인 측면에서 비교하게 되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불행해져요. 각자가 다르다는 수평적인 차원이 아니라, 우등과 열등의 수직적인 차원으로 비교하다 보면, 우리 중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요. 그런데 진짜 나다움이라는 측면에서는 우리 각자가 모두 세계 1인자입니다. 그렇기에 헤드윅의 원작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자기다운 방식으로 했던 것은 참 현명한 선택이었어요.  

 

이번 공연에서 그가 한 말들 가운데 성소수자들은 어린 나이에 은유에 눈뜨게 된다는 말이 가슴 한켠에 남았습니다. 

 

When you are an outsider and queer, there is an understanding of metaphor earlier, meaning that something has a surface and then it has a true nature. (만약 당신이 아웃사이더나 성소수자라면 은유의 속뜻에 대해 남들보다 일찍 눈뜨게 됩니다. 겉모습과는 다른 진정한 본성이 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지요.) - John Cameron Mitchell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예술계에서 활동하는 유능한 퀴어들이 그래서 많은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 일찍 철들게 되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존재 방식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다보니 자연히 익히게 되는 능력이라니....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 이토록 해맑게 자신의 이야기들을 아무런 은유 없이 들려주는 은발의 퀴어를 보고 있자니까, 새로운 희망이 생깁니다. 어린 퀴어들이 숨김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세상, 메타포가 더이상 필요없는 세상이 한걸음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아 집으로 돌아오는 밤공기가 더욱 상쾌하게 느껴지더군요!!!!

 

P.S. 이 공연을 모두 보고 나오면서 꼬부 큰언니 왈 "뮤지컬이라며? -_-+(째릿)" 합니다.

웅...그러게 말야...난 뮤지컬인줄 알았네??? 뭐 그래도 좋았잖아~ 헤헤헤 (땀 삐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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