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저는 벽장 레즈비언 입니다. 벽장 레즈비언 (Closet Lesbian)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주변에 드러내지 않은 여성 동성애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모 커뮤니티를 통해 우린 서로를 알게 되었고, 예전에 사귀던 사람을 제외하면 친구는커녕 '이쪽'에 아는 사람조차 없었어요.
연애 초반에는 이반 친구들이 없다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서로에게 하소연하며 풀면 되는 것이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에도 둘 만으로 충분하니까요. 당시에 느꼈던 단점을 굳이 꼽아보자면, 간혹 중국요리를 먹으러 갈 때 다양한 메뉴를 맛보고 싶지만 단 둘이 가야 하다 보니 기껏해야 한 두 가지 정도밖에 먹어 볼 수 없는 정도랄까요? 저흰 맛집 다니는 걸 엄청 좋아하니까요! ^^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하는 그녀가 내 곁에 있다해도, 우리 관계를 건전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선 단 둘 만의 노력으론 채우기 힘든 부분이 있다는 걸 차츰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크고 작은 갈등을 겪기 마련이며 이성애자 부부들은 그런 일들이 있을 때에 자신이 맡은 다양한 역할들과 얽힌 관계들의 촘촘한 틀이 그런 파도를 넘어가게 해줍니다. 아이들의 부모로서의 역할, 누군가의 자식된 도리, 사회 속에서의 지위, 지인들과의 관계 등등... 퀴어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들에 억지로 매여 살지 않아서 참 기쁘기도 하지만, 그런 다양한 관계들이 주는 심리적인 지지대가 없다는 면에서는 참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꼭 필요로 하는 것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저는 행복한 삶을 위해선 신체적 건강, 정서적 안정, 경제적 여유, 사랑하는 반려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거든요. 그런데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는 걸 나이 들며 깨달았습니다. 그녀와 제겐 좋은 친구들이 필요했습니다.
누구나 사회 안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가족들과 맺는 관계도 소중하고, 회사에서 일로 맺는 관계도 꼭 필요하고, 동기들과의 친목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제 경우엔 그 사람들과는 결코 공유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내 성정체성을 그들은 몰랐고, 이 중요한 퍼즐 한 조각을 그녀 이외의 사람들에겐 꽁꽁 숨겨두었기에 타인들의 눈에 제 삶은 절대 완성되지 않는 그림같이 보였을 겁니다.
내 삶의 중요한 퍼즐 한 조각을 숨기고 지낸다는 건, 참말로 피곤합니다. 지난 주말에 뭐했어요? 라는 아주 일상적이고 무심한 질문에도 그녀와 관련된 부분을 숨기기 위해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여 이야기를 꾸미거나 장소를 바꿔서 거짓말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그들도 내 불편한 기색을 조금씩 눈치 채게 되었고, 저 역시 뭔가를 숨기는 게 피곤해져서 그들과의 관계가 귀찮아졌으며, 결론적으론 그녀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과 조금씩 소원해졌지요.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후회되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과연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또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 싶어요. 사랑에 아파하고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출근해야 했을 때에도, 명절 연휴에 단 둘이 신나게 어딘가로 여행을 떠날 때에도, 본가에서 아주 먼 직장을 선택했을 때에도, '그녀'가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 사람인지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제 모든 행동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어느 정도 둘이 함께 지내는 생활이 안정되고 나서, 이쪽 친구들을 사귀기 위한 몇 번의 시도를 했었지만 쉽지 않았어요. 굳이 이반으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세상을 살면서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건, 참 힘든 일입니다. "좋다"는 말이 품고 있는 뜻이 너무나 다양하고 모호하며, 무엇보다도 주관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람, 좋은 친구란 과연 뭘까요? 소극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최소한 우리에게 사회적/경제적 해악을 끼치지 않는 사람일 테고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 우리에게 특별히 거슬리지 않을 만한 범주에 속해서, 함께 대화를 할 때 별다른 거부감 없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요. 우리와 문화적 관심사나 유머코드가 잘 맞아서 함께 할 때에 즐거운 사람일 수도 있지요. 어쩌면 솔직함과 무례함의 경계를 잘 구별하는 사람이거나, 상대의 감정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우리와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일 수도 있고, 만남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서로에게 쓸 용의가 있는 사람일 수도 있죠.
어쩌다가 위의 조건들 가운데 한두 가지가 맞는 사람들과 운 좋게 만나기도 했지만, 너무 멀리 산다든가 각자 너무 바쁘다든가 하는 이유로 그들과 더 가까워지지는 못했습니다. 몇 번의 좌절을 겪다보니 이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사람을 찾는다는 건,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 찾기, 아니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신기루를 찾아 헤매는 미친 짓과도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완성형의 누군가가 있는 게 아니고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조금씩 만들어가는 것인데 그땐 좀 성급했다고 생각해요.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치명적인 단점들을 갖고 있지만, 그 단점들이 있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하고 서로 조심할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한데 말입니다. (그걸 인정하고 나니, 참 신기하게도 좋은 사람들이 주위에 보이기 시작했고, 철들고 이런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점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당시엔 친구 찾기에 한줄기 희망도 보이지 않았고, 이대로 가다가는 '그녀와 나의 관계'에만 매몰되어 서로에게 번아웃되는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둘이서만 놀고, 둘이서 티격태격 하다가, 둘이서 다시 화해하고, 둘이서 놀러가고, 또 다서 둘이서 싸우고....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둘이 함께하기 위해서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내 우리에게 새로운 '가족'이 필요한 순간이 온 것 입니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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