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부 큰언니는 영화를 참 좋아합니다. 특히, 밝고 경쾌한 주제의 영화들을 좋아하는 그녀의 고민은 이성애자들의 사랑 이야기에는 전혀 몰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남녀의 러브 스토리는 정서적으로 와 닿지 않는대요. 그래서 가끔 이반 팟캐스트에서 소개되는 퀴어 영화가 있을 때면, 그녀는 열심히 제목을 적어와선 제게 같이 보자고 조르곤 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여성퀴어 단편영화 상영제 소식을 듣고서 그녀와 함께 신나게 신청을 했습니다. 티켓 오픈 12시간 만에 매진될 정도로 엄청난 호응을 받으며 진행된 제1회 망원동 여성퀴어 단편영화 상영회 "클리가 있나?" 입니다.
처음에 이 상영회의 이름을 듣고서 빵 터졌습니다. 풉...클리라니...?그런데 조금 달리 해석해 보자면, 그녀들의 도발적이며 유머러스한 타이틀 뒤에는 꽤나 냉소적이며 자조적인 질문이 숨겨져 있습니다. 여성 퀴어 영화산업이 클 리가 있나요? 여성이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영화들이 시장으로부터 외면 받는 현실에서, 마이너 중 마이너인 여성 성소수자의 컨텐츠가 지닌 상업적 성장 가능성이 얼마나 되냐는 비관론적인 질문으로 봐도 그 공허한 마음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그런 염려들을 시원하게 날릴 정도로 상영회는 즐거웠고, 그동안의 여성 퀴어 영화에 대한 갈증을 시원하게 뻥 뚫어주는 청량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날, 여성퀴어 단편영화 네 편이 상영되었는데 이다연 감독님의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SOO NOT SUE 감독님의 "찰나", 안지희 감독님의 "차장님은 연애중", 장윤주 감독님의 "모모"가 상영되었고 모모를 제외한 세 작품의 감독님들과 작가님들, 출연자 분들이 참석하셨어요.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는 이다연 감독님의 졸업 작품이라고 하시던데, 완성도 면에서 그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상미도 있고 연출 면에서 고민의 흔적들이 많이 느껴진데다 마지막 장면까지도 구성이 좋았어요. 두 번째로 감상한 "찰나"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심쿵 달달한 설렘들이 화면 가득 채워져 있어 행복했고, 게다가 유튜브에서만 보던 수낫수님을 직접 상영회에서 뵈니까 정말 연예인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꺄앗!) 그리고 안지희 감독님의 "차장님은 연애중" 작품은 온라인으로 이미 봤던 작품인데도 큰 스크린으로 다른 관객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보니까 또 봐도 더욱 더 유쾌하고 즐거웠어요!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노래도 참 좋았는데, 안지희 감독님이 가사까지 쓰셨다네요.
이번 상영회에서는 까페 유남생의 향긋한 더치커피와 예쁜 드라이 플라워, 그리고 여성 퀴어의 필수품, 손톱 정리용 파일까지 모든 관객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좋은 영화를 만드느라 고생하시고, 첫 상영회를 준비하느라 이미 충분히 고되었을 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선물까지 또 힘들게 마련하셨을까.... 그 이유를 짐작해보니 퀴어 컨텐츠를 소비해 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관객들에게 표시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또 다른 무언가를 유형의 선물로 되돌려 받지 않더라도, 창작자들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감사한걸요. 즐거운 영화 네 편에다 선물까지 덤으로 주셔서 뭔가 크게 빚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관객과 제작자, 서로의 존재에 대한 존경과 감사가 넘치는, 흔치 않은 훈훈함이었어요.
여성 퀴어 컨텐츠에 갈증을 느끼던 관객들로 꽉 채워진 극장이, 중의적인 의미의 "클 리가 있나?"라는 질문에 대한 따뜻한 대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관객들의 열렬한 응답을 받으신 고양이 바주카를 비롯한 여성 퀴어 컨텐츠 창작자들의 앞날을 저희 커플도 응원합니다!!!
P.S. 세 분 감독님의 다음 작품이 정말 기대됩니다. Q&A Session에서 세 감독님의 다음 작품 계획을 꼭 여쭤보고 싶었는데, 관객분의 질문 세례가 이어져서 저희에겐 기회가 오기도 전에 소중한 시간이 끝나버렸... ㅠ_ㅠ 상영회 2회는 언제 하시나요? 플리즈 텍마머니!!!!!!!